어떤 장면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 깊숙한 곳에서 아련함이 배어 나온다. 그 시간을 꾸리는 동안 나눈 시선과 대화, 맡은 냄새, 들은 소리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형태로 남아있거든. 그중에는 일부러 의미를 더한 기억도 있고 그렇게 하지 않아도 충분히 특별한 것들도 있다. 오늘은 의미 있고도 특별한 장면, 그 일화 하나를 소개해 볼까 한다.

스타트업에서 일했을 때 나는 꽤 자주 밤마다 사무실에 혼자 남았다. 스타트업 팀원이었던 교수님이 계셨는데, 그분이 나에게 보고서 및 기획안 작성법에 관련된 추가 코칭을 해주셨거든. 나는 교수님이 내주신 기획안 과제를 작성하랴 밤 11시까지 사무실 책상 앞에 죽치고 앉아있곤 했다. 끙끙 머리를 싸매다 문득 집에서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데, 룸메이트인 너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밤 산책을 할 겸 나를 데리러 오겠다는 내용이다. 

이과대학 언덕 아래로 총총 내려간다. 바람에 흔들리는 소맷자락 같은 나뭇가지 사이로 천천히 걸어오는 네가 보인다. 함께 사는 친구를 데리러 오는 소녀의 편안한 발걸음, 머리카락과 어깨를 잇는 익숙한 선들이 어렴풋이 보인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활짝 웃는다. 집에서 매일 보는 우리지만, 밖에서 또 마주하면 곧은 별천지를 보는 것처럼 각별하고 반갑게 느껴져서.

아침 새벽엔 스터디, 낮에는 업무, 밤에는 과제. 그러니 그해 괜찮다고 말했지만 지금은 인정하는, ’사실은 허덕였던 그 시기’를 어떻게 버텼냐고 묻는다면. 어둠 속에서 가만 우리를 지켜보던 그 계절 벚꽃나무의 목소리를 빌려 의미를 더해본다면. 달빛이 만든 그림자를 함께 밟으며 집으로 돌아가 주는, 든든한 내 룸메이트에게 빚진 투명한 마음일 거다. 그리고 이건 앞으로도 내가 일상 아래로 가만가만 꺼내볼 순수한 동화같은 사연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