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이 너를 처음 봤을 때. 너무도 오래된 그 이야기를 여기서 상세히 회상해서 풀어내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보다는 그다지 친하지 않았던 너와 나의 관계, 멀리서 너를 바라보면서 무심결에 했던 생각, 그리고 너를 보고 배우며 차차 바뀐 나 자신의 이야기로 한 발짝 내딛는다면. 그러면 우리의 처음이 기억날지도 모르겠다.

나는 열일곱의 괴짜 고등학생으로, 오만 가지 일에 욕심이 많아 어디서나 완벽하고자 애쓰던 여고생이었다. 공부를 잘해서 선생님들로부터 이쁨 받고, 권력이 좋아 학생회도 하고, 주변을 웃기는 재간으로 교우관계도 좋고, 그러면서도 인생을 즐기고 싶은 마음이라 축제 때마다 무대 위에서 춤도 추고 싶었다. 이런 내가 스스로 욕심쟁이 팔방미인 같다가도, 반쯤은 오버스러운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고 있을 때 너를 만났다.

잘 웃어서 순해 보이는 건지 순해서 잘 웃는 건지 몰랐다. 동글동글한 눈에 윤기가 흐르는 생머리, 작은 키. 조곤조곤 말을 뱉는 다람쥐 같은 너를 학생회에서 처음 만났을 땐, 솔직히 말하면 ‘친해질 일은 없겠다’고 생각했다. 왁자지껄한 나와 달리 너의 주위엔 늘 차분한 공기가 맴돌았거든. 어떤 때는 세상만사 심드렁해 보이다가도 또 어떤 때는 말랑말랑한 웃음을 짓는 너, 그리고 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선이 있는 것 같았다. 

애매한 그 관계를 유지하다가 진짜 ‘너’를 알게 된 것은. 서울대학교 멘토링 프로그램에 함께 참여하면서다. 멘토 선생님들을 앞에 두고 ‘서울대 의류학과에 진학하고 싶다’고 또랑또랑 말하는 너를 봤다. 서글서글한 둥근 눈매 위로 미래를 향한 강한 낙관이 서려 있는 것을 그때 어렴풋이 느꼈다. 어쩌면 그 긍정적이고도 여유로운 에너지를 배울 수 있겠다고, 배우고 싶다고 너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갔다.

우리는 시험 기간마다 일찍 학교에 가서 공부하고, 그러다 새벽이 되면 통화를 걸어 서로의 나른한 목소리를 들으며 암기했다. 이상하게 지문을 읽는 너의 목소리를 들으면 항상 마음이 편안해졌고, 어스름한 독서실 책상 아래에서 스스로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어느덧 서로의 목소리가 잦아든 잠결엔, 이 순간에 머물러서 해가 떠오르는 것을 함께 바라보는 느낌이기도 했다. 생각해보니 고3, 제일 힘든 시기에 남 모르게 함께 했던 우리였다. 그래서 다른 친구가 “오잉, 너네 안 친한 줄 알았는데.”라고 말하면, 웃픈 고개를 끄덕이고 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