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나는 스물다섯의 유진이야. 처음이라는 감각에 무뎌지고 일상의 온도가 미지근해지는 순간도 겪어본 2023년의 나는 2018년의 너를 종종 떠올리곤 해. 모든 것이 새로운 너는 하루하루가 무척 설레겠지. 처음인 것투성이라 당황스럽고 걱정되는 순간도 있을거야. 그래도 너는 씩씩하니까 결국 다 잘 해내겠지. 초중고 12년 동안 한 번도 개근상을 놓치지 않은 성실한 너는, 숙취가 심하거나 친구들과 노는 게 너무 재밌어도 수업에 빠지면 큰일이 날 줄 알겠지만, 괜찮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술자리에서 선배의 번호를 받고 정말로 밥 먹자고 연락해도 될까 여러 번 고민하겠지만, 괜찮아 후회하지 않을거야. 화장실을 어떻게 청소하는지 모르겠고 직접 끓인 김치찌개가 맛이 없어서 엄마가 보고싶어져도 참겠지만, 괜찮아 엄마는 어떤 소식이든 언제나 네 전화를 기다리더라고. 최근에서야 들은 얘기인데, 엄마는 나를 서울에 두고 진주로 내려가면서 내가 곧 굶어죽을 줄로만 알았대. 아니면 보고싶다고 엉엉 울면서 전화라도 올 줄 알았다고 하더라. 전화 자주드려! (이건 지금의 나에게도 해당되는 잔소리지만)

너는 5년 뒤 내 모습을 한 번만 보고 왔으면 좋겠다는 말을 가끔 했었지. 고등학교 때 3년 뒤의 네 모습을 너무나 궁금해했던 것처럼 말이야. 3년 전 어느 대학, 어떤 학과를 가게 될지 답을 미리 알고싶어 했지만 결국 끝까지 하다보니 원했던 네 모습을 마주한 것처럼, 지금의 너도 5년 뒤 나를 마주한다면 크게 놀라지는 않을거야. 우리는 듣는 노래도 좋아하는 옷 스타일도 하고 싶은 일도 달라졌지만, 여전히 닮은 구석이 훨씬 많으니까. 네가 지금 만나는 사람들과 경험들은 지금까지도 깊게 뿌리내려 나를 지탱해 주고 있단다. 같은 과 친구들, 동아리에서 만난 사람들, 그리고 너의 룸메이트. 그들과 만나고 웃고 얘기하면서 크고 작은 추억들을 쌓아줘서, 또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었어. 덕분에 그때의 인연이 지금의 나에게 안정감이 주고, 또 다른 소중한 사람들을 내 곁에 데려다줬거든. 

그때 네가 고민 끝에 내렸던 수많은 처음의 선택이, 지금의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줬어. 그래도 고민은 오래 안고 있지 말고, 그냥 해 유진아. 아는 게 0이라는 걱정보다는 배울 게 100이라는 기대를 했으면 좋겠다. 네가 그토록 궁금해할 지금의 내가 충분히 행복하다고 하면 너에게 더 힘이 될까. 행복하게만 살 수 있다고 자신하는 너에게, 누군가는 너를 위해 슬픔도 아픔도 겪어보길 바란다고, 영원한 건 없다고 얘기할지도 몰라. 아마 너는 긴 토론 끝에도 네 의견을 굽히지 않았지만 내심 혼란스러웠겠지. 솔직히 말하면 지금의 나는 그때 그 조언이 어떤 의미인지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지만, 그 말을 이해하게 된 지금도 나는 여전히 행복하다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약속할게.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려 본다. 나는 쉬는 시간마다 복도에서 춤을 추고 비트에 맞춰 랩을 하던 우스꽝스러운 학생이었다. 친구들은 그런 나를 보고 ‘아란이는 시도 때도 없이 웃고 있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지금에서야 솔직하자면 겉과 달리 속은 그리 여유롭지는 못한 것 같다. 나는 책상에 낙서를 끄적이더라도 ‘올 1등급이 목표’라고 적기보단, ‘수시 6개 다 떨어질 거야’라고 적는 학생이었다. 목표를 위해 나를 꽉 쥐고 압력을 가하던 냉정한 내면이 있었다. 대학이란 인생에서 꼭 한 번쯤 항해해야 할 거대한 바다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국영수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던 나. 그렇게 스무 살이 되어 서울에 안착했다. 어느 새내기처럼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술을 많이 마셨다. 또래 친구들보단 고학번 선배들과 함께한 날이 많았다. 학번이 높은 언니오빠들일수록 품고 있는 이야기 보따리의 모양새가 다채로웠다. 창업과 주식으로 월세를 번 이야기, 실연의 아픔으로 세상과 동떨어져 산 이야기, 그리고 서울을 벗어나 세계여행한 이야기 등. 소주잔에 맺힌 이슬처럼, 차갑게 맺고 뜨겁게 미끄러지는, 가끔은 그 투명한 이슬을 거울이었다고 술회하기도 하는 이야기들이었다. 마음을 부지런히 움직여가면서 경청했다.

적당한 온도의 이야기들로 술집 온도는 미지근하게 덥혀졌다. 나는 ‘자기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와는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그 인생들 속에서, 언젠가 써내려 가고픈 사건을 발견해 나갔다. 국영수는 머릿속에서 지워진지 오래였다. 대신 미술을 배우고, 연애를 하고, 중국어를 공부했다. 하고 싶은 대로 사는 인생의 질감을, 그렇게 처음 음미했다.

언젠가 나도 스무 살들에게 내 이야기를 들려줄 기회가 온다면. 쉽고 빠른 취업법 혹은 교수님의 전화번호가 아닌, 삶과 바다를 두려워하지 않은 마음을 선물하고 싶다. 수평선 너머로 편안하게 일렁이며 ‘천천히 호흡해도 좋다’고 다독이는 노을처럼, 바다를 무서워하지 말자고. 바다에 가본 사람은 모두 알잖아. 반짝이는 윤슬 위로 고개를 내미는 돌고래도, 몸을 섞으며 뒤척이는 해양식물도, 신난 낚시꾼의 흥얼거림도 있으니까. 우리는 그런 바다 위에서 그저 유영하며, 무심히 흐르는 인생의 옆얼굴을 지켜봐 보는 것이 어떻겠냐, 이렇게 겸손을 담아 전하고 싶다.